죽음을 각오해 본 적은 없지만, 각오하고 고통 속에 뛰어들어 본 적은 딱 한 번 있다. 그것은 고통을 고통으로 무마하기 위한 자기위로 형식의 자해였으며, 그다지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. 그럼에도 나는 농구골대 위에서 뛰어내린 행동이 유일한 고통에 대한 자의적인 도전이었다. 필사적.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다하는 것. 이 단어를 뱉을 정도의 각오가 되어있나?
아마 오늘 학원을 갈 때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,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박고 손으로 흙을 쓸었기 때문에. 스스로 노력했어! 라고 자신할 수 있다면 학원을 가는 것이 즐거웠겠지. 적어도 내 실수를 짚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겠지. 그렇기에 지금 난 부끄럽고, 도망치고 싶다. 그 이유를 이렇게 적어놓는다.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기에.
큼직한 돌의 평평한 부분을 만지면 기분 좋은 소리가 나고, 어딘가 듬직하게 느껴진다. 듬직한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 든다. 햇빛을 받았을 땐 온기가 느껴지고, 그늘이 졌을 땐 시원함이 느껴진다.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. 물론 벽돌같은 가공 된 녀석도 있지만, 역시 투박하고 큼직한 녀석이 좋다.
효율을 중심으로 사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비효율이 생긴다면 인생이 잘못 된 듯 한 감각을 느낀다. 결국 그 감각 때문에 효율적인 인생이 아니라면 행복을 느끼지 못 하고, 평범하게 행복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도 "아, 이건 효율적이지 못 하겠는데" 라고 생각해버린다. 비효율을 추구하진 않 되, 효율을 추구하는 삶은 지양해야 한다.